‘타인은 지옥이다.' 처음 이 문장을 발견했을 때 묘한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풀리지 않던 인생의 문제가 풀린 기분이랄까요. 답을 찾았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생은 사람 덕분에 행복하기도 하지만, 사람 때문에 무너지기도 하는 것이니까요.
처음을 떠올려 봅니다. 사람 덕분에 행복했던 순간과 사람 때문에 무너졌던 처음의 기억. 분명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이기심과 오만, 시샘과 무례함 때문에 상처를 받고 한없이 무너져야 했던 시간들. 그렇게 알게 되었습니다. 상처의 시작도, 수없이 맺고 끓어졌던 인연의 이름들도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다행이다 싶었지만 참 씁쓸한 일이었죠.
숱하게 무너져 나를 끝없이 갉아먹는 시간이었을 텐데, 시간의 힘 앞에 이렇게 굴복하게 되다니, 분한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숱한 인간관계 속에 처한 자신의 고독과 절망을. 그것은 사랑의 이름으로, 우정의 이름으로, 동료의 이름으로, 상사의 이름으로, 간혹 가족의 이름으로 찾아옵니다. 틀어지고, 엉클어져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혼돈에 빠진 관계들.
두 사람이 하나의 벽을 사이에 두고 서 있습니다. 두 사람은 손잡이가 없는 문 앞에 서서 망연자실한 채 문을 바라보죠. 분명 쉽게 들어온 문인데, 들어오고 보니 막상 출구가 되어 줄 문의 손잡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손잡이가 보이지 않는 문,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된 사람은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리며 애원하고, 손잡이를 찾는데 열중합니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손끝은 나무에 베고, 찢어져 상처가 납니다. 손잡이가 없는 문 앞에서 손잡이를 찾는 사람들. 나는 인간관계를 생각하면, 이런 장면이 떠오릅니다.
사실 문의 손잡이는 없는 게 아닙니다. 단지 보이지 않거나 발견하지 못하는 것뿐. 문의 손잡이의 존재를 처음부터 명확하게 알고 있거나 찾게 되는 사람이, 인간관계에서 소위 주도권이라 불리는 권력을 쥐게 되죠. 언젠가부터 사람을 만나며, 세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상대방에게 절대 기대하지 않을 것.
둘째, 상대방에게 나를 해칠 수 있는 권력을 주지 않을 것.
셋째, 상대방에게 상처받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은 버릴 것.
이렇게 생각하자 어렵기만 했던 인간관계가 어느 정도는 감 당할 수 있는 영역이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말처럼 "타인"은 분명 "지옥"일 수 있습니다. 분명 인간관계를 명확하게 보여 준 문장은 나에게 묘한 안도감을 주었지만 해결점까지 주지는 못했습니다.
"이봐. 철학자 양반, 그래서 빠져나갈 방법은?" 답을 알 수 없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처절하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깨달은 점이 있다면, 더 이상 그 지옥에 앉아 손잡이도 없는 문 앞에서 한없이 무너지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하필 나에게만 이런 상처를 주느냐'며 타인을 탓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지나간 인연, 지나간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죠. 말 그대로 사람들틈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기로 했습니다. 문의 손잡이가 무엇엔가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는 일이 없도록. 언제든지 그 문을 열고 나올 수 있도록. 나만의 타이밍으로 언젠가 생각나지도 않을 사람들 때문에 내 인생을 허비하게 내버려두지 말자고.
타인이 지옥의 모습으로 올지라도. 그 지옥도 언젠가 잊혀지리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너지지만 말자고 다짐합니다.
잊혀질 이름 때문에 자신을 갉아먹지도 말기를, 타인은 분명 지옥이지만, 낙원이 되어 주기도 한다는 걸 되새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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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은 지옥이다.' 처음 이 문장을 발견했을 때 묘한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풀리지 않던 인생의 문제가 풀린 기분이랄까요. 답을 찾았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생은 사람 덕분에 행복하기도 하지만, 사람 때문에 무너지기도 하는 것이니까요.
처음을 떠올려 봅니다. 사람 덕분에 행복했던 순간과 사람 때문에 무너졌던 처음의 기억. 분명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이기심과 오만, 시샘과 무례함 때문에 상처를 받고 한없이 무너져야 했던 시간들. 그렇게 알게 되었습니다. 상처의 시작도, 수없이 맺고 끓어졌던 인연의 이름들도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다행이다 싶었지만 참 씁쓸한 일이었죠.
숱하게 무너져 나를 끝없이 갉아먹는 시간이었을 텐데, 시간의 힘 앞에 이렇게 굴복하게 되다니, 분한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숱한 인간관계 속에 처한 자신의 고독과 절망을. 그것은 사랑의 이름으로, 우정의 이름으로, 동료의 이름으로, 상사의 이름으로, 간혹 가족의 이름으로 찾아옵니다. 틀어지고, 엉클어져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혼돈에 빠진 관계들.
두 사람이 하나의 벽을 사이에 두고 서 있습니다. 두 사람은 손잡이가 없는 문 앞에 서서 망연자실한 채 문을 바라보죠. 분명 쉽게 들어온 문인데, 들어오고 보니 막상 출구가 되어 줄 문의 손잡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손잡이가 보이지 않는 문,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된 사람은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리며 애원하고, 손잡이를 찾는데 열중합니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손끝은 나무에 베고, 찢어져 상처가 납니다. 손잡이가 없는 문 앞에서 손잡이를 찾는 사람들. 나는 인간관계를 생각하면, 이런 장면이 떠오릅니다.
사실 문의 손잡이는 없는 게 아닙니다. 단지 보이지 않거나 발견하지 못하는 것뿐. 문의 손잡이의 존재를 처음부터 명확하게 알고 있거나 찾게 되는 사람이, 인간관계에서 소위 주도권이라 불리는 권력을 쥐게 되죠. 언젠가부터 사람을 만나며, 세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상대방에게 절대 기대하지 않을 것.
둘째, 상대방에게 나를 해칠 수 있는 권력을 주지 않을 것.
셋째, 상대방에게 상처받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은 버릴 것.
이렇게 생각하자 어렵기만 했던 인간관계가 어느 정도는 감 당할 수 있는 영역이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말처럼 "타인"은 분명 "지옥"일 수 있습니다. 분명 인간관계를 명확하게 보여 준 문장은 나에게 묘한 안도감을 주었지만 해결점까지 주지는 못했습니다.
"이봐. 철학자 양반, 그래서 빠져나갈 방법은?" 답을 알 수 없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처절하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깨달은 점이 있다면, 더 이상 그 지옥에 앉아 손잡이도 없는 문 앞에서 한없이 무너지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하필 나에게만 이런 상처를 주느냐'며 타인을 탓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지나간 인연, 지나간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죠. 말 그대로 사람들틈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기로 했습니다. 문의 손잡이가 무엇엔가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는 일이 없도록. 언제든지 그 문을 열고 나올 수 있도록. 나만의 타이밍으로 언젠가 생각나지도 않을 사람들 때문에 내 인생을 허비하게 내버려두지 말자고.
타인이 지옥의 모습으로 올지라도. 그 지옥도 언젠가 잊혀지리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너지지만 말자고 다짐합니다.
잊혀질 이름 때문에 자신을 갉아먹지도 말기를, 타인은 분명 지옥이지만, 낙원이 되어 주기도 한다는 걸 되새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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