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말하기보단 들어주는 것에 익숙해서, 많은 사람들이 나의 그늘 안에서 머물다 가곤 한다. 마땅히 좋은 해결책을 내어주지 못한 적이 훨씬 많은데도 말이다. 말로 자리를 내어주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아무 말 없이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괜찮다. 그늘은 원래 말이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잠시 머물다 가기 위해 그늘을 찾곤 한다. 따가운 햇볕을 피하기 위해서든 아니면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하기 위해서든.
하지만 그늘의 공간은 한정적이다. 그래서 모든 이들이 다 그늘 안에서 안식을 취할 순 없다. 보이지 않는 경계를 둔다. 쉼터 속에서 편하게 쉬어가는 사람과 쉼터 밖 전쟁 통에서 투쟁하는 사람. 그늘 밖에 선 많은 이들은 아직도 비를 맞고, 눈을 맞고, 햇빛의 직사광선을 그대로 쬐어 고통받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의도적으로 외면받고 무시당하기도 한다.
문화적 경계. 여기선 특정 문화나 관습에 속하지 못한 소수민이 그늘 밖으로 밀려난다.
정치적 경계. 여기선 자유롭게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이 그늘 밖으로 밀려난다.
경제적 경계. 여기선 양극화로 밀려난 가난한 이들이 밖으로 밀려난다.
그들은 마음속에 그늘을 피운다. 내면의 어둠이 드리워지고, 그곳에서 자신을 숨긴다. 어떻게, 왜 만들어졌는지 모를 경계 밖으로 밀려나 그 경계를 유지하는 집단들로 하여금 소외당한다.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한다. 애초에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외쳐도 개가 짖는 소리와 같은 취급을 받기에 그냥 소리를 삼키는 쪽을 택하는 것이 익숙하다. 이건 '불평등'이 아니라, '불공정'한 일이다. 왜 평등이 아닌 공정의 영역인지는 나중에 설명하겠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이 불공정함을 당연한 것이라고 혹은 더 나아가 그렇게 태어난 게 잘못이라 말한다면, 또한 그게 이 사회의 당연한 수순이라고 대부분이 인정한다면, 인간은 그 시점을 빌미로 그냥 멸종하는 쪽을 택하는 게 차라리 낫다.
내가 착해서 이런 소리를 하는 건 아니다. '당신은 뭐 얼마나 깨끗하게 살았다고 입발린 솜씨를 뽐내며 글을 쓰느냐'라고 묻는다면, 적어도 더럽게 산적은 없다. 그렇게 느꼈다면 유감이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두고 위선자라고 소리친다면, 그건 아주 옳게 보았다. 한데 인간은 원래 다 가면을 쓰며 살아가고 모두 다 위선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나도 나 자신에게 어두운 면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고, 그걸 마주하며 괴로워할 때도 있다. 다만 소외받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 시스템은 붕괴되기 마련이다. 역사가 이를 증명해 준다. 인간이 최소 사이버펑크 로봇으로 개조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진정으로 그런 냉소적인 상태에서 빠져나오길 바란다고 말해주고 싶다.
한창 무더운 여름날, 당신은 햇빛을 잠시 피하러 주변 건물 속으로 들어가거나 그늘 속으로 몸을 숨긴 적이 한 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대개 그럴 때면 당신은 누군가에게 허락을 구하고 햇빛을 피하진 않는다. 그늘 아래에 들어가는 일은 특정 권리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적 그늘은 그렇지 않다. 마치 없던 권리도 만들어내어 누군가가 경계를 구분 짓고 사람을 가른다. 이건 법의 개념이 아니다. 사회적 시선이 만들어 낸 결과다.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흑인 백인 황인
남성과 여성
다수 민족과 소수 민족
이 개념들 중에서, 특정 대상에게만 권리를 부여해야 할 마땅한 이유가 있는가? 안타깝게도 세계 여러 곳곳에선 아직도 이 개념들을 두고 차별을 행하고 있다. 그들은 왜 비를 피하지 못해야 하며, 햇빛을 가리지 못해야 하는가? 문제는 꼭 저렇게 큰 단위의 구분으로만 설명되는 것도 아니다. 잘생긴 사람과 못생긴 사람, 공부를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 유명한 사람과 별로 유명하지 않은 사람 등 별의별 기준을 다 세우고 사람을 가르고 있는 게 현재 실정이다.
애초에 평등한 사회란 없다. 우린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이란 선 아래에서 시작해 왔다. 그리고 이건 자신의 능력 밖의 영역이며 통제할 수 없는 '환경'이다. 다만, 적어도 공정한 사회는 만들어 갈 수 있다. 여기서 앞서 말했던, 왜 불평등이 아니라 불공정이란 단어를 택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다.
'평등'이란 쉽게 말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인간이란 생명체는 애초에 균등하지 못하다. 신체적 조건, 외모, 지능, 유전적 질환 등 분명히 타고난 재능의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들이 만든 사회라는 시스템은 당연히 평등할 수가 없었다. 부, 지위, 가정환경, 교육 등 태어날 때부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당연히 유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정'은 '각자의 필요나 상황에 맞게 적절히 나누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인간 사회는 시간이 지나 과거에 비해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하지만 여전히 그 한계가 있으며 바로잡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 쉽게 예를 들면, 못생긴 사람과 잘생긴 사람은 불평등 아래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 차이를 대우나 기회에서 공정하게 다루지 않는다면, 그때는 불공정이 문제로 대두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평등보단 공정을 바라봐야 한다.
결국 말하고 싶은 것은 누구든지 그늘 아래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하는 사회는 만들 수 있지 않겠냐는 거다. 바람직한 사회적 시선을 두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도록 하는 그늘을 만들어주는 데엔 그리 큰 대가가 따르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들어주는 상대방이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을 수 있다. 말로 자리를 내어주는 일은 어느 정도 숙달된 전문가들의 영역이긴 하나, 누군가의 목소리에 경청하는 자세를 갖추는 일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말이 많은 사람들에겐 어려울까?)
나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꼭 조언을 해줄 필요는 없다.
그저 당신은 편하게 쉬어가라는 듯이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며
“
그늘처럼 자리를 잠시 내어주기만 해도 충분하다
by 사색가 연두 https://brunch.co.kr/@yeondupoet/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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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말하기보단 들어주는 것에 익숙해서, 많은 사람들이 나의 그늘 안에서 머물다 가곤 한다. 마땅히 좋은 해결책을 내어주지 못한 적이 훨씬 많은데도 말이다. 말로 자리를 내어주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아무 말 없이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괜찮다. 그늘은 원래 말이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잠시 머물다 가기 위해 그늘을 찾곤 한다. 따가운 햇볕을 피하기 위해서든 아니면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하기 위해서든.
하지만 그늘의 공간은 한정적이다. 그래서 모든 이들이 다 그늘 안에서 안식을 취할 순 없다. 보이지 않는 경계를 둔다. 쉼터 속에서 편하게 쉬어가는 사람과 쉼터 밖 전쟁 통에서 투쟁하는 사람. 그늘 밖에 선 많은 이들은 아직도 비를 맞고, 눈을 맞고, 햇빛의 직사광선을 그대로 쬐어 고통받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의도적으로 외면받고 무시당하기도 한다.
문화적 경계. 여기선 특정 문화나 관습에 속하지 못한 소수민이 그늘 밖으로 밀려난다.
정치적 경계. 여기선 자유롭게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이 그늘 밖으로 밀려난다.
경제적 경계. 여기선 양극화로 밀려난 가난한 이들이 밖으로 밀려난다.
그들은 마음속에 그늘을 피운다. 내면의 어둠이 드리워지고, 그곳에서 자신을 숨긴다. 어떻게, 왜 만들어졌는지 모를 경계 밖으로 밀려나 그 경계를 유지하는 집단들로 하여금 소외당한다.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한다. 애초에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외쳐도 개가 짖는 소리와 같은 취급을 받기에 그냥 소리를 삼키는 쪽을 택하는 것이 익숙하다. 이건 '불평등'이 아니라, '불공정'한 일이다. 왜 평등이 아닌 공정의 영역인지는 나중에 설명하겠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이 불공정함을 당연한 것이라고 혹은 더 나아가 그렇게 태어난 게 잘못이라 말한다면, 또한 그게 이 사회의 당연한 수순이라고 대부분이 인정한다면, 인간은 그 시점을 빌미로 그냥 멸종하는 쪽을 택하는 게 차라리 낫다.
내가 착해서 이런 소리를 하는 건 아니다. '당신은 뭐 얼마나 깨끗하게 살았다고 입발린 솜씨를 뽐내며 글을 쓰느냐'라고 묻는다면, 적어도 더럽게 산적은 없다. 그렇게 느꼈다면 유감이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두고 위선자라고 소리친다면, 그건 아주 옳게 보았다. 한데 인간은 원래 다 가면을 쓰며 살아가고 모두 다 위선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나도 나 자신에게 어두운 면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고, 그걸 마주하며 괴로워할 때도 있다. 다만 소외받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 시스템은 붕괴되기 마련이다. 역사가 이를 증명해 준다. 인간이 최소 사이버펑크 로봇으로 개조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진정으로 그런 냉소적인 상태에서 빠져나오길 바란다고 말해주고 싶다.
한창 무더운 여름날, 당신은 햇빛을 잠시 피하러 주변 건물 속으로 들어가거나 그늘 속으로 몸을 숨긴 적이 한 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대개 그럴 때면 당신은 누군가에게 허락을 구하고 햇빛을 피하진 않는다. 그늘 아래에 들어가는 일은 특정 권리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적 그늘은 그렇지 않다. 마치 없던 권리도 만들어내어 누군가가 경계를 구분 짓고 사람을 가른다. 이건 법의 개념이 아니다. 사회적 시선이 만들어 낸 결과다.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흑인 백인 황인
남성과 여성
다수 민족과 소수 민족
이 개념들 중에서, 특정 대상에게만 권리를 부여해야 할 마땅한 이유가 있는가? 안타깝게도 세계 여러 곳곳에선 아직도 이 개념들을 두고 차별을 행하고 있다. 그들은 왜 비를 피하지 못해야 하며, 햇빛을 가리지 못해야 하는가? 문제는 꼭 저렇게 큰 단위의 구분으로만 설명되는 것도 아니다. 잘생긴 사람과 못생긴 사람, 공부를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 유명한 사람과 별로 유명하지 않은 사람 등 별의별 기준을 다 세우고 사람을 가르고 있는 게 현재 실정이다.
애초에 평등한 사회란 없다. 우린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이란 선 아래에서 시작해 왔다. 그리고 이건 자신의 능력 밖의 영역이며 통제할 수 없는 '환경'이다. 다만, 적어도 공정한 사회는 만들어 갈 수 있다. 여기서 앞서 말했던, 왜 불평등이 아니라 불공정이란 단어를 택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다.
'평등'이란 쉽게 말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인간이란 생명체는 애초에 균등하지 못하다. 신체적 조건, 외모, 지능, 유전적 질환 등 분명히 타고난 재능의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들이 만든 사회라는 시스템은 당연히 평등할 수가 없었다. 부, 지위, 가정환경, 교육 등 태어날 때부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당연히 유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정'은 '각자의 필요나 상황에 맞게 적절히 나누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인간 사회는 시간이 지나 과거에 비해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하지만 여전히 그 한계가 있으며 바로잡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 쉽게 예를 들면, 못생긴 사람과 잘생긴 사람은 불평등 아래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 차이를 대우나 기회에서 공정하게 다루지 않는다면, 그때는 불공정이 문제로 대두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평등보단 공정을 바라봐야 한다.
결국 말하고 싶은 것은 누구든지 그늘 아래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하는 사회는 만들 수 있지 않겠냐는 거다. 바람직한 사회적 시선을 두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도록 하는 그늘을 만들어주는 데엔 그리 큰 대가가 따르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들어주는 상대방이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을 수 있다. 말로 자리를 내어주는 일은 어느 정도 숙달된 전문가들의 영역이긴 하나, 누군가의 목소리에 경청하는 자세를 갖추는 일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말이 많은 사람들에겐 어려울까?)
나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꼭 조언을 해줄 필요는 없다.
그저 당신은 편하게 쉬어가라는 듯이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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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처럼 자리를 잠시 내어주기만 해도 충분하다
by 사색가 연두 https://brunch.co.kr/@yeondupoet/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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