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스토리]침대는 날 판단하지 않아

2025-12-04

행복한 세상을 실현하는 NGO. 행복한가



대인기피증이 심했을 때는 밖으로 나가 거리를 걷는 것만큼 고역인 일이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 하나하나가 나에 대한 평가와 판단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안 그래도 자기중심적이던 자아가 한도 끝도 없이 비대해졌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평가와 해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차츰차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대인기피를 벗어난 지금일지라도 사람들과 공존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감당하기 힘든 부침을 주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침대가 있다.

침대는 '질문'하지 않는다. '판단'하지 않는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침대는 항상 '날 위해 여기'있다. 그래서 침대는 좋다. 이 밈이 한국사회에서 많은 사랑과 공감을 받는 것은 놀랍지 않다. 어느새 침대는 경쟁과 성과, 소통과 자기 계발의 압력에서 벗어난 유일무이한 공간이 되었다. 어떤 측면에선 전쟁터에서 돌아온 현대인들의 퇴각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위의 밈에서 침대란 조건 없는 수용자다. 침대의 무조건적 수용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서 말하는 아가페적 사랑과 닮아있다. 아가페적 사랑은 타인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관심이다. 소유나 집착이 아닌 상대방을 향한 보살핌과 책임감이다. 우리는 이런 성숙한 사랑을 쉬이 꿈꾸곤 하지만 그보다 더 쉽게 좌절된다. 어쩌면 침대밈은 내가 꿈꾸는 이상적 타자를 침대에 투영하여 탄생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욕망하고 있는 무조건적인 수용이라는 사랑의 형태는 '사랑의 출발점'에 불과하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은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되지만 서로의 차이를 견디며 둘만의 진리를 구축하는 장기적 실천이라고 보았다. 사랑의 시작보다 그 사랑을 지속하려 노력하는 그 이후의 삶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침대의 무조건적 수용에서 사랑을 느끼는 것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그러한 사랑이 충족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이후의 삶까지 생각할 만큼의 여력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바디우에 따르면 사랑은 수용을 기반으로 '공동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행위이다. 즉, 침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사랑의 기원적인 감각이다.

나는 공존의 감각을 떠올린다. 침대 밑 깊숙이 화석처럼 굳어있는 불편한 감각을 떠올린다. 동시에, 무한한 평가와 성과주의 사회에서 피로하다는 말론 다 못할 정도로 지친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침대 같은 사람이 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침대에 몸을 누이는 행위는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받아주는 사랑의 첫 감각으로 되돌아가려는 몸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어떤 질문도 판단도 하지 않는, 따뜻함과 부드러움으로 날 위해주는 사랑말이다. 이젠 그 사랑의 출발점을 침대 바깥에서 시작해보고 싶다.

 



by 오영 https://brunch.co.kr/@clairetcal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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