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더하기 > 성씨정보

성씨정보

성씨별 유래를 제공합니다.

    • 성씨박(朴)

      본관영해

      주요인물박경,박원계,박자청,박헌영,박구일

      #박헌영 #독립운동가

      유래
      시조 박제상(朴堤上)은 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으로 유명하며 신라 파사왕의 6세손이다.
      신라 내물왕 때 이손 신랑주간 등을 지냈고, 418년(눌지왕 1년) 삽량주(경북 양산군) 태수로 있던 박제상은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있던 눌지왕의 첫째 동생 복해(卜海, 또는 보해)를 탈출시켜 귀국했으며 집에도 들르지 않고 다시 일본에 특파되어 볼모로 잡혀있던 눌지왕의 둘째 동생 미사흔(未斯欣, 또는 미해)을 탈출시켜 귀국하게 하였다.
      자신은 체포되어 발 가죽을 벗기고 갈대위를 걷게 하고, 쇠를 달구어 그 위에 세우는 등의 고문을 당하며 일본 신하가 될것을 강요 당하였으나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며 거절하고 박다진 목도(木島 : 기시마섬)에서 화형을 당해 죽었다. 지금도 갈대 위가 붉은 것은 박제상 피의 흔적이라고 한다.
      박제상이 부인 김씨에게는 알리지 않고 일본으로 떠난 뒤 그 사실을 알고 쫓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자 망덕사(望德寺) 남쪽 모래 위에서 몸부림치며 통곡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은 그 모래를 장사(長沙)라 하였으며, 친척 두 사람이 부인을 부축하여 돌아오려 하자 부인은 다리를 뻗은 채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곳을 벌지지(伐知旨 : 뻗치다의 고유음)라 하였다.
      박제상이 돌아오지 않자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두 딸과 치술령(述嶺: 수릿재. 울산, 경주 경계에 있음.)에 올라가 남편을 부르며 통곡을 하다가 죽어서 망부석이 되었다. 이 망부석은 현재도 유명한 망부석이며 사람들이 부인 김씨를 치술신모(수릿재 신모)라고 하여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두 딸 박아기, 박아경 또한 아버지를 부르며 통곡을 하다 죽으니 세 모녀를 "호국삼신여"라 칭하고 치술 신모사를 지어 제사를 지내게 하고 국대부인에 봉했다.
      왕이 박제상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대아찬에 추증하고 단양(영해)군에 봉했으며, 박제상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그의 둘째 딸을 미사흔과 결혼시켰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26세손 중시조 박천명(朴天命)이 고려 때 전법사판서를 지냈으며 벽상공신으로 예원(영해)군에 봉해지자 본관을 영해로 하였다.
      참고: [삼국유사 1권 내물왕과 김제상 - 삼국유사에는 김제상으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 [일본서기]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북도 영덕
      영해(寧海)는 경상북도 동북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일찍이 고구려의 야시홀(也尸忽)과 우시국(于尸國)이 있었다. 79년(신라 탈해왕 23)에 신라가 병합하여 757년(경덕왕 16)에 우시국을 유린군(有隣郡)으로, 야시홀을 야성군(野城郡)으로 바꾸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영덕(盈德)과 예주(禮州)로 개칭하였으며, 1018년(현종 9)에 예주(禮州)에 병합되었다가 후에 다시 분리시켜서 현령(縣令)을 두었다. 1258년(고종 45)에 예주가 덕원소도호부로 승격하였고 1310년(충선왕 2)에는 영해부로 개편되었다. 1413년(태종 13)에는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가 설치되었고 1415년 지현사(知縣事)를 두었다가 현령(縣令)이 파견 되어 조선시대 동안 명맥이 이어졌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영덕과 영해현은 안동부로 이관되었다가, 이듬해 경상북도로 관할이 변경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영해군이 폐지되고 영해면으로 축소되어 영덕군에 통합되었고, 1979년에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현재 영덕군의 관할구역은 영덕읍·강구면·남정면·달산면·지품면·축산면·영해면·병곡면·창수면 등 1읍 8면으로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