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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정보

성씨별 유래를 제공합니다.

    • 성씨차(車)

      본관연안

      주요인물차약송, 차범근, 차인표, 차승원, 차태현

      #차범근 #축구선수

      유래
      황제(黃帝)의 후손인 신갑(辛甲)께서 고조선 평양 일토산 아래에 살면서 성을 왕씨(王氏)로 하고 이름은 조명(祖明)이라 하였다. 고조선말 그의 후손 왕몽(王蒙)이 기자조선 준왕(準王)의 모함을 받아 칠남 임(琳)과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가 숨어서 살게 되었다. 이때 蒙은 자손 번창을 이유로 왕(王)씨 성(姓)을 전자(田字),신자(申字),차자(車字)로 고쳐 성을 차씨(車氏)로 하고 이름을 무일(無一)이라 하였다. 신라태조가 경주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울 때 車 無一께서 시중 벼슬에 오르고 왕으로부터 車氏 성을 받게 되어 車氏 득성시조(得姓始租)가 되었다. 車 無一의 32세손인 건갑(建甲 一名 建申 )께서 신라39대 소성왕때 승상 벼슬에 있었는데 소성왕께서 태자를 잘 보살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승상께서 왕의 유언에 따라 12세에 보위에 오른 애장왕을 보필하시다가 아들 승색(承穡)에게 다시 왕을 보필 할 것을 부탁하고 별세하시니 왕께서 왕례로서 기장 만화동에 예장케 하였다. 이때부터 車陵 이라 칭하게 되었으며 기장현도 차성(車城)이라 불렀다. 또 신위도 소성왕 종묘에 배향되었다. 왕의 숙부인 김언승(金彦昇)이 반역하여 왕위를 빼앗아 헌덕왕이 되었다. 차승색께서는 충성심에서 아들 차공숙(車恭叔)과 더불어 헌덕왕을 암살하려다 누설되어 아들을 데리고 황해도 구월산으로 피신, 류(柳)씨로 변성하고 이름을 백(栢 일명 桓)으로, 아들도 숙(淑)으로 고쳐 살았다. 둘째 아들 차공도(車恭道)는 강남으로 피신 구성인 王氏로 복성하였는데 이분이 고려태조 왕건의 증조부이신 원덕대왕(元德大王)이시다. 이런 인연으로 車氏는 王氏와 똑같은 왕족 대우를 받았다.
      고려 태조 왕건께서 후삼국을 통일할 때 가성 柳氏 6세인 류해(柳海)께서 장정을 수송하여 통일에 기여하였으므로 공을 삼함통합벽상이등공신에 봉하고 본성이 車氏이기에 조상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 차달(車澾)이라는 호를 내렸다. 큰 아들 차효전(車孝全)은 통일에 필요한 군량미를 헌납하였기에 개국 공자로 대광(大匡之佰)의 벼슬이 제수되었으며 연안군(延安君)에 피봉되었다. 연안에 식읍 천호도 받으시고 옛성 車氏로 복성케 되고 종적(宗籍)을 연안(延安)으로 하니 延安車氏 득관시조(得貫始租)가 되었고 둘째 아들 효금(孝金)은 柳氏로 승계가 되었다. 이때부터 두 형제 분이 車氏와 柳氏로 각각 분성되었다. 車門은 신라, 고려조에 수많은 문무장상이 대를 이어 배출된 명문집안이다. 고려 공민왕때 군부판서 차포온(龍山君 車蒲溫)은 고려가 원(元)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때 국방 및 외교로 뛰어난 활약을 하신 고려의 명신이며, 車門의 자랑스러운 현조이시다. 또 불의에 굴하지 않았고 고려말 성리학의 대가 운암공 차원부(蕓巖公 車原부)께서 조선 개국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와 하륜 등 사얼(四孼)들의 모략으로 억울하게 추살되시고 車氏 문중도 멸족지화를 당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된 이태조의 질책으로 태종이 잘못을 뉘우치고 공에 대한 치제(致祭)를 명하고 아울러 의정 부좌찬성 벼슬을 추증했고 그후 문절(文節)이란 시호도 내렸다. 다행히 세조2년에 왕명으로 박팽년외 5인의 가문에 유신석학 48인의 응제시와예조참판 하위지의 서문으로 엮은 차원부 설원기(車原부 雪寃記)에 의하여 억울한 사실이 소명되어 광명을 찾기는 하였으나 車氏 문중에 대한 수난은 계속되었다. 車氏 문중에는 세조 13년 이시애난 평정에 공를 세운 강열공 차운혁(車云革) 임진왜란시 평양성 로포문(露布文)으로 명나라를 놀라게한 천하 문장 오산공 차천로(車天輅)와 가은 명조·현조님들이 많이 계셨다. 근대에는 포우단(砲牛團)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하신 차도선(車道善), 대동공보(大同共報)를 창간, 독립운동을 하신 차석보(車錫甫),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으로 큰 활약을 하신 차이석(車利錫)외 많은 독립 유공자에게 정부 건국 훈장이 수여 되었으며 이 분들이 車氏 문중을 빛내었다. 車氏 문중은 절개 굳은 충신, 공신, 의사와 열사가 유달리 많은 종문이며 명문 갑족다운 긍지를 잃지 않고 자자손손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황해도 연백
      연안(延安)은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일원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 때 동음홀(冬音忽) 또는 고염성(鼓鹽城)이라 부르다가 신라시대에 해고군(海皐郡)으로 바꾸었다. 고려에서는 염주(鹽州)·영응현(永膺縣)·복주(復州)·석주(碩州)·온주(溫州) 등으로 고쳐 불렀고, 1310년(충선왕 2)에 연안(延安)으로 고쳤다. 1413년(태종 13)에 연안도호부가 되었고,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연안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연안군은 다시 배천군(白川郡)과 합하여 연백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