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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정보

성씨별 유래를 제공합니다.

  • 성씨의 의의
    성씨란 부계나 모계, 즉 단계(單系)로 내려오는 친족집단의 이름이며, 본관이란 그들이 출계해 내려온 본거지를 말한다. 씨성(氏姓)이나 토성(土姓)의 의미가 성과 본관을 함께 나타내기 때문에 성씨 자체를 이 둘이 합쳐진 의미로도 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성씨를 통해 혈연적인 귀속의식을 강하게 지녀왔다. 호적에 반드시 본관을 넣어 부계혈통을 밝히고, 동성동본간에는 혼인을 못하게 하고, 이름을 지을 때 항렬을 따져 반영하는 것 등이 그 예다. 각 종중에서 끊이지 않고 족보를 작성하여 오는 것도 이러한 의식의 발로다.

    우리의 성씨는 대부분 중국식을 모방한 한자 성으로 그 역사는 삼국시대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는 이전부터 사용하던 고유의 성을 한성화(漢姓化)한 왕실과 성을 사여(賜與)받은 귀족에게만 국한되어 쓰였다. 그러다 고려시대로 들어와 관료층과 양민층에게, 조선 후기에 이르러 천민층에게까지 단계적으로 보급되어갔다.

    이런 성씨의 성장과정은 문명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사회적 심리적 정치적 역학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삼국시대 성씨
    고구려 -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건국 시조 주몽은 국호 고구려라고 하였기에 고(高)씨라고 하였으며, 주몽은 충신들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를 사성하였다고 전해 내려온다.

    또 유리왕이 사성 하였다는 위씨, 우씨 또는 대무신왕이 사성 하였다는 낙, 부정, 대실씨 등은 전설이라고 하더라도 대무신 왕때의 을두지, 송옥구를 비롯하여 이후 재상급만도 목도루, 고복장, 명림답부, 을파소, 고우루, 명림어수, 음우, 창조리, 을지문덕, 연개소문 등등의 이름이 있으며, 또한 왕비나 왕모의 성으로 예, 송, 우, 연, 주씨 등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중국 한서에 나타나 있는 인명의 기록을 보면, 주몽은 이름만 기록되어 있으나, 장수왕 때에 장수왕 이름을 고연(高璉)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 하였으며, 장수왕이 사신으로 보낸 고익, 마루, 손참구, 동마 등의 이름에도 모두 성을 사용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성씨 중에서 고구려에 연원을 두는 성씨는 극히 드물다.

    고씨는 고주몽의 후손이 강원도 횡성 지방에 약간 산재한다고 전해지고 그 외의 고씨는 모두 탐라 고씨계이다. 오직 강씨가 고구려의 장군이었다는 강이식을 시조로 하고 있다.
    백제 – 백제에서는 시존 온조(溫조祚)가 부여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扶餘)씨라고 하였으나 중국의 후한서, 삼국지, 진서에는 왕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모두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되어 있으며, 진서, 송서 등의 기록에는 근초고왕(13대)부터 위덕왕(27대)까지는 여(餘)씨로 표시하다가 무왕(29대)부터 부여(扶餘)씨로 기록하였다. 또한 온조를 따라 남하하여 백제 건국에 공을 세우고 십제 공신이 되었다는 전섭과 마여를 원조로 하는 전씨와 마씨가 있다.

    개루왕때 인물인 도미를 선계로 하는 성주도씨가 있으며, 백제가 망하자 당나라로 망명하여 당 고종으로부터 새로 사성받고 웅진도독이 되어 귀국했다는 부여융을 시조로 하는 부여서씨가 있다. 이 외에 백제 8대 성과 같은 성으로 진씨, 연씨, 국씨가 현재도 있기는 하나 그 연원이 분명치 않다
    신라 –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의 기원은 아무래도 신라에서 연원한 것이 많다. 박(朴)•석(昔)•김(金)의 3성과 이(李)•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의 6촌성을 하사했다고 한다.
    박,석, 김 3성의 전설이 전해 오며, 유리왕 9년(32)에 육부(六部)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 정(鄭), 손(孫), 최(崔), 배(裵), 설(薛)씨의 성을 사성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7세기 초까지만 해도 아직 성씨가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성씨가 쓰이기 전에는 신분을 표시하는 역할을 했던 것은 그 사람의 출신지 였다. 다만 왕실에서는 24대 진흥왕 때부터 김씨를 사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신라 왕실의 김씨를 제외한 그 밖의 6촌성들은 그보다 훨씬 뒤인 중기에야 비로소 등장하게 된다. 다만 가락국의 시조로 알려진 수로왕의 12대손인 김유신은 제외이다. 김유신은 누이가 태종무열왕의 비가 되면서부터 김유신이 처음으로 김씨를 사용하게 된 것 같다는 설도 있다.
    고려시대 성씨
    성씨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부터였다. 그렇다고 태조 왕건이 일률적으로 성을 갖도록 한 것은 아니었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합했다고는 하지만 개국 초기에는 중앙집권적인 정치제도도 확립되지 않았으며 각 지방은 신라 말기에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어 반란이 일어나던 무렵이라 각 지방을 근거로 독자적인 기반을 닦고 성장한 토착 세력이 한 개 군정도의 지역을 차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지배 영역 내의 농민으로부터 조세를 거두어들이는 등 독립적인 지위를 누리면서 성주나 장군으로 일컫고 있던 호족들에게 지배되고 있었다.

    이에 태조 왕건은 개국 초기부터 측근 세력을 구축하기 위한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새 왕조를 수립하는 데 공을 세운 중앙 세력에게 성을 많이 하사하였다. 또한 중앙과 연결된 호족들도 그들 나름대로 성을 갖게 됨으로써 많은 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고려의 개국공신에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있는데 그들은 처음에는 성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웠기 때문에 홍술을 홍유, 백옥을 배현경, 삼능산을 신숭겸, 복사귀를 복지겸 등으로 태조 왕건이 성을 하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홍유는 부계홍씨, 배현경은 경주배씨, 신숭겸은 평산신씨, 복지겸은 면천복씨의 시조가 되었다. 또한 왕건이 세력을 점차 넓히게 되자 각처에서 왕건의 편에 서서 궁예와 견훤의 세력을 물리치고 고려 왕조를 창업하는 데 공을 세운 호족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명주(강릉) 장군이라 일컫던 왕순식, 벽진(성주) 장군이라 일컫던 이총언, 고울부(영천)장군 황보능장 등이었다.

    왕순식은 명주의 호족으로 고려 건국 후에 까지도 지방에서 독립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승려로 고려 지배권에 살던 아버지가 귀순을 권하자 맏아들 수원을 보내 귀부 했으며, 다른 아들 장명에게는 1백명의 사병을 데리고 가서 태조의 왕궁을 숙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후에는 자신도 태조를 배알하여 왕씨 성과 대광이란 관직을 받았다.

    이총언은 왕건의 권유를 받고 아들 영에게 군사를 이끌고 왕건을 돕게 했으며, 황보 능장은 왕건을 도와 공을 세우고 영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총언은 벽진이씨의 시조가 되고, 황보능장은 영천황보씨의 시조가 되었다.

    오늘날의 성씨 중 상당수는 고려 개국공신의 후예들이다. 앞에서 언급한 신숭겸, 배현경, 복지겸, 홍유나 무송유씨의 시조인 유검필처럼 군인으로서 공을 세워 중앙세력으로 등장한 인물도 있었고, 지방 세력으로도 왕순식, 이총언, 황보능장 이외에도 많은 사람이 있었다.

    문화유씨의 시조인 유차달은 황해도 유주(문화)의 부호였는데 왕건이 견훤을 칠 때 천 량의 수레를 동원하여 군량을 보급해 주었다고 하며, 전의이씨의 시조 이도는 왕건이 남정할 때 금강의 물이 넘쳐서 군사들이 강을 건너지 못할 때 그들이 강을 건널 수 있게 해 주었고, 양천허씨의 시조 허선문은 공암(양천)의 부농으로서 왕건의 군사들에게 군량을 대어 주었다고 한다.

    또한 이들 외에도 고려 개국공신으로 각 성씨의 시조가 된 이들이 많았다.

    안동권씨의 시조 권행, 안동김씨의 시조 김선평, 청주한씨의 시조 한란, 남양홍씨의 시조 홍은열, 홍주홍씨의 시조 홍규, 인동장씨의 시조 장정필, 남양방씨의 시조 방계홍, 원주원씨의 시조 원극유, 파평윤씨의 시조 윤신달, 용인이씨의 시조 이길권, 청주이씨 의 시조 이능희, 면천박씨의 시조 박술희, 아산이씨의 시조 이서, 동주최씨의 시조 최준옹, 풍양조씨의 시조 조맹, 영광전씨의 시조 전종회, 선산김씨의 시조 김선궁, 해평김씨의 시조 김훤술, 봉화금씨의 시조 금용식 등이 그들이다.

    이들 가운데 권행은 원래 김씨였으나 권씨 성을 하사받았고, 그 외에는 성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은 없어 고려 건국 이전부터 사용하던 성이었던 듯하다. 고려 건국 이전에 성씨가 널리 보급되었으리라고 생각되는 근거로는 고려 초기의 호장을 시조로 삼은 예가 많음을 들 수 있다.

    호장이란 고려 건국 초에 새 왕조에 귀부하지 않은 지방세력들을 강제로 향리의장으로 삼아 강제로 새 왕조에 귀속시켰던 것을 말한다.

    그 예로는 신라에서 벼슬을 살던 성주이씨의 시조 이순유는 고려가 건국되자 이에 불복하고 이름을 극신으로 고쳐 경산(성주)에 숨어 살다가 경산부의 호장으로 강제로 귀속되었고, 역시 신라의 신하였던 기계유씨의 시조 유의신은 기계현의 호장이 되었다.

    그외에 호장이었던 인물을 시조로 하고 있는 성씨로는 광주이씨, 한산이씨, 진성이씨, 합천이씨, 덕산이씨, 고흥유씨, 단양유씨, 고령신씨, 순창조씨, 동래정씨, 봉화정씨, 창녕성씨, 예안김씨, 반남박씨, 양주조씨, 무송윤씨, 목천상씨 등이 있다.

    위에 든 성씨 이외에도 고려 초기의 인물을 시조로 하고 있는 성씨가 많은 것으로 보아 신라말 부터 고려 초에 이르는 사이에 지방호족이나 고려의 공신들이 대부분 왕으로 부터 성을 하사받거나 성을 만들어 가졌다고 보여지며 고려에 들어와서는 성씨 앞에 본관을 표시하여 혈족 계통을 구별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성씨는 특권층만 가지고 있었고 일반화되어 있지는 않았다.

    성씨가 일반화된 요인 중의 하나는 958년 (광종9)부터 실시된 과거제도를 들 수 있다.

    중국 후주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한림 학사가 된 쌍기의 제안으로 시작된 과거제도는 제도가 자리잡아 가는 과정에서 과거에 응시하기 위한 필수 요건으로 성을 가져야 하고 본관(출신지)을 밝혀야만 했다. 더욱이 11대 문종9년(1055)에는 응시자의 성명, 본관, 4대조 까지의 이름을 써서 풀로 봉하여 미리 시원에 제출하도록 하는 봉미 제도를 시행함으로써 성은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천민계급에 속해 있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성이 없었다.
    조선 시대 성씨
    조선 건국 후에도 고려시대의 정책이 계승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천민들은 여전히 조선조 초기까지도 성을 사용하지 못하였다. 천민들까지 모두 성을 갖게 된 것은 신분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한 임진왜란 후부터 한말에 이르러서였다.

    임진왜란으로 군사체제의 개편이 불가피하게 되자 그대까지 병역의무가 지워지지 않았던 천민층 까지 모두 징발당하게 되었다. 이들 천민층이 전쟁 중에 공을 세우면 평민 신분으로 올려 주었으며 임진왜란 후 사회체제의 변동에 따라 천민들이 하급관리로 등용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양민층 이상만 가질 수 있었던 성을 노비들까지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1894년 갑오경장으로 종래의 신분계급이 타파됨으로써 성의 대중화가 촉진되었으며 1909년 민적법이 시행되면서 누구나 다 성을 갖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성을 새로 만들 때 중국의 성현이나 명문 거족의 성을 사용하여 그들의 후예인 것처럼 자처하는 시대적인 풍조에 젖는 일이 많았으므로 성의 기원이 비록 중국이라 하더라도 그 성을 가진 사람의 조상이 중국인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영조때의 영의정 도곡 이의현은 우리나라의 성씨의 수를 298성이라 하였고, 증보 문헌비고에는 406성이 나와 있다.

    성씨가 보급된 뒤에도 무성층으로 남아 있던 공사노비•화척(禾尺), 향•소•부곡민, 역•진민 등 천민층은 10세기 이래 조선시대까지 개별적인 신분해방과 신분상승으로 인하여 부분적으로 성씨를 획득해갔지만, 그들에게 성씨가 획기적으로 보급된 시기는 조선 후기였다.

    조선 전기(15, 16세기)까지만 해도 노비를 비롯한 천민층이 전체 국민 가운데 대략 절반을 차지하였으니 무성층이 그만큼 많았다. 그렇게 많았던 천민층이 16세기말부터 시대적•사회적 변동에 따라 신분해방과 함께 새로 성을 가지게 된 계층이 격증해 갔다.

    특히 1894년 갑오경장을 계기로 종래의 신분•계급이 타파된 것은 성의 대중화를 촉진시켰으며, 1909년 새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부터 누구나가 다 성과 본을 가지게 끔 법제화되었다. 무성인이 상당수 있었는데 이때를 기하여 새 성을 갖게 되자 갖가지 희화극이 벌어졌다 고 한다.

    성이 없는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주었다. 노비의 경우는 상전의 성을 따랐다. 김•이•박씨가 많은 데서 그러한 대성을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이 때문에 종전의 대성명문들은 그 수가 더욱 늘어 갔다. 가령, 전주에서 출생한 사람은 이씨, 경주지방 출신은 김씨나 최씨 하는 식으로 출신지의 대성이나 문벌을 본떠서 자기 성을 삼은 경우가 많았다. 오늘날의 희성•벽관 가운데 당시 경찰이 호구 조사를 할 때나 호적담당 서기가 호적을 기재하면서 한자의 획(劃)을 잘못 적은 데서 비롯된 것도 적지 않다.
    일제 강점기 성씨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지배하던 시기에는 모든 사람이 성씨를 갖도록 하는 민적법(民籍法)이 1909년에 시행되었다. 이 법이 적용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도록 제도화가 되었고,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때를 기회로 성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동 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 집안의 성씨를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이때부터 성씨의 종류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우리나라 성씨 사상 최대의 수난기는 일제 말기인 1939년 말부터 실시된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일본식 성명 강요) 제도라 할 수 있다. 창씨개명은 일제가 패망하고 1945년 9월부터 미군정이 개시되면서 1946년 10월 23일 법령 제122호로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이 공포됨으로써 그 시작부터 무효가 되었다.
    현대사회 성씨
    계층과 직종에 관계없이 누구나 성과 본을 가지고 있다. 성씨 관념과 관련있는 관습과 민속이 많다. 가령, 자녀혼인에 있어 어떤 성을 선호하는 대신 특정한 성은 금기하는 관행이 있으며, 일년간의 신수를 점칠 때나 토정비결 같은 것을 볼 때도 접촉하는 사람의 성씨에 따라 이해득실이 있다는 것이다.

    성씨는 일찍부터 우리 민족과 애환을 함께 하면서 분화, 발전해 왔는가 하면 신분의 상승과 하강에 따라 무성에서 유성으로, 또한 유성층에서 무성층이 되기도 하였다.

    성씨는 당초 왕실부터 시작하여 귀족•관인•양민•천민순으로 보급되어 갔기 때문에, 신성시 또는 특권시되어 득성 유래와 시조의 출자에 관해서는 신화와 민담이 많이 전승되고 있다.

    성씨에 관한 속담도 비교적 많다. 가령, 조선시대 이래 ‘성불변의 원칙’이 철저히 지켜져 온 우리 나라에서 맹세 또는 굳은 약속을 할 때 ‘성을 갈겠다.’는 말을 한다든지, 근대 이후 성이 일반화되자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름도 성도 모른다.’라 한다든지, 우리의 성 가운데 김씨와 이씨가 절대 다수라는 데서 ‘촌놈 성 김가 아니면 이가다.’라든지, 또는 ‘김씨가 한몫 끼지 않은 우물은 없다.’라는 속담들이 있다.

    또한, 상대방과의 수인사에서 성씨를 묻는다는 것이 하나의 상식화되어 있는 우리 사회에서 ‘머슴살이 삼년에 주인 성 묻는다.’, ‘한 집안의 김별감성을 모른다.’, ‘10년을 같이 산 시어미 성도 모른다.’는 등의 속담도 있다.

    또한, 성에 따라 별명을 붙이는 경우가 있다. 성의 출자와 유래 또는 시조나 조상에 관한 일, 또는 발음이나 어휘에 따라 박씨는 ‘말’, 정(鄭)씨는 ‘당나귀’, 정(丁)씨는 ‘곰배’, 홍씨는 ‘물렁감’ 하는 식의 별명을 쓰기도 하였다.

    성과 본에 관한 법적 규정은 재래의 관습인 ‘성불변의 원칙’과 ‘부부각성주의’를 택하고 있다. 「민법」에 “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르고 부가에 입적하며, 부를 알 수 없는 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르고 모가에 입적한다. 부모를 알 수 없는 자는 법원의 허가를 얻어 성과 본을 창설하고 일가를 창립한다. 그러나 성과 본을 창설한 뒤 부 또는 모를 알게 된 때에는 부 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 (781조).”라는 규정을 두고 있다.

    여기에서 나타나듯 우리 나라의 성은 원칙적으로 부계혈통을 표시하며, 성의 변경은 특수한 경우 이외에는 일체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혼인하여 부부가 되더라도 외국의 경우처럼 성을 바꾸지 않으며 각자의 성을 가진다.

    그러나 「민법」은 입부혼인제도(入夫婚姻制度)를 인정하고 이 경우에 한하여 입부혼인에 의한 출생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르도록 함으로써(826조 4항), 모계혈통을 표시하는 성이 되는 경우도 생겼다.

    서양자(壻養子)의 자의 성과 본에 대해서는 별도로 규정하는 바 없으므로 부의 성과 본을 따른다고 해석된다.

    그러나 서양자는 입부혼인의 경우와 같이 부(夫)가 처가에 입양하여 그 출생자는 모가, 즉 양가에 입적할 뿐만 아니라 호주상속을 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하더라도 모의 성과 본을 따르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성(異姓)양자의 성과 본에 대해서는 아무런 규정도 하지 않고 있으므로 성불변의 원칙상 변경되지 않는다고 해석된다.

    구관습법에는 서양자는 허용하지 않았으나, 신민법은 이를 창설하여 남자 없는 가족을 위하여 획기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무남독녀가 호주 또는 호주상속인인 경우라 할지라도 반드시 입부혼인을 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입부혼인을 한 경우에는 부부는 처의 주소나 거소에서 동거해야 하며, 그 부부 사이의 출생자녀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르고 모의 가에 입적한다(826조).

    아동복지시책으로서의 고아입양문제와 함께 최근 새로운 형식의 입양은, 양친됨에는 기혼•미혼남녀를 구별하지 않으며(866조), 양자됨에 있어서도 남녀•소목(昭穆)을 가리지 않음(877조)은 물론, 이성양자까지도 인정하여 전통적인 입양과 그 내용을 달리하고 있으나, 양부모의 입양목적에는 별로 큰 변동이 없다.

    자녀 없는 양부모가 가계를 잇기 위한 것이 주된 입양목적이기 때문에 현대적 입양 역시 남아가 더 많이 입양되고 있으며, 양자의 성이 무엇이었든 간에 양친의 호적에 기재되는 양자의 성과 본은 양부와 동일해야 한다는 뜻에서 친생자로서 신고되기 마련이다.

    전통적인 유교사회에서는 ‘동성불혼’•‘이성불양’의 관습하에 윤리적 또는 우생학적 견지에서 동성동본간 금혼제가 철저히 지켜졌으나, 현재와 같이 인구의 급증과 이동, 산업화와 도시화로 종래 한 부락에 살던 동족이 사방으로 이산되고 김해 김씨•전주 이씨•밀양 박씨 등 수백 만이 넘는 동성자가 시조를 같이한다고 하여 촌수를 가릴 것 없이 그 사이의 혼인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남녀평등을 기조로 한 현대사회에서 모계혈족에 대해서는 최근친을 제외하고는 혼인을 방임하면서 부계혈족에 대해서는 촌수의 제한 없이 금혼하는 것은 일종의 남녀차별이다.

    최근 이름의 한글화와 함께 성씨의 한글화도 장차 거론되겠지만, 성자의 한글표기에 있어 ‘리(李)’•‘류(柳)’로 하는 씨족이 있어 두음법칙에 어긋나는 예가 있듯이, 성은 이름과 달라서 성을 한글로 표기하는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우리 나라의 성씨에 관한 최초의 구체적인 자료는 세종조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 성씨조로서 성씨의 내부구조와 시대적 변화상을 잘 보여주고 있는 반면, 18세기 이후에 쏟아져 나온 각 성씨 족보들은 당대인의 수록에도 개관(改貫), 투탁한 예가 많았던 것은 물론, 특히 시조의 유래와 조상의 계보에는 조작과 분식(粉飾)이 가해져 오히려 성씨의 발생과 분화 및 발전과정을 구명하는 데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일제시대 성의 연혁과 당시의 성에 관한 연구•조사서로는 총독부 중추원 발행의 『조선의 성명씨족에 관한 연구조사 朝鮮の姓名氏族に關する硏究調査』와 국세조사과에서 간행한 『조선의 성 朝鮮の姓』이 있다.

    1930년대에 이루어진 이러한 광범위한 조사와 연구검토는 식민통치하에 우리 나라의 특징적인 현상이라는 혈연을 중심으로 한 동족부락의 성격을 보다 조직적으로 파악하려는 데 궁극적 목표가 있었다.

    최근 학계에서는 사회구조•사회변동과 같은 사회사를 살피는 한 과정으로서 족적 문제와 관련하여 성씨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으며, 고려•조선시대 연구에 있어서는 정치적•사회적 지배세력의 형성과 내부구조 및 소장관계를 성씨와 관련하여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